’ 회색도시’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오직 모바일로만 발매한 핸드폰 전용 게임입니다. 덕분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들어본 적조차 없을 정도의 평범한 유명세를 지닌 게임입니다.
그러나 게임을 직접 해본 사람들은 게임의 플랫폼이나 가격 같은 외부적인 부분에 비난을 할지언정, 게임의 작품성에 날 선 소리를 가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회색도시 2는 엉킨 실타래처럼 엮인 인과와 그에 얽힌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처절하리만큼 표현하여,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복수’라는 중심 소재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비교적 최근, 똑같이 ‘복수’라는 소재를 썼음에도 공감 부족한 결론을 내놓는 모 작품과 비교하면, 굉장히 설득력 있고 마음에 와닿는 내용을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너 말이야 너
..아무튼, 회색도시 시리즈는 이러한 스토리 외에도 깔끔한 비주얼과 음악, 실감 나는 성우 연기 등등 종합적으로 감히 ‘명작’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흠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모바일 게임만을 제작해 왔던 이 제작팀의 이번에는 콘솔게임 개발에 도전을 하게 됩니다. 기존 회색도시 시리즈를 발매한 회사와 완전히 결벌을 한 채로 말이지요.
불안 요소는 많았지만, 제작팀의 기존 작품들을 즐겨보았던 팬들이라면 이 신작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기존 회사와의 내부사정으로 회색도시 3 개발이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 만큼 더더욱 이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눈여겨본 게이머들은 의외로 많았을지 모릅니다.
발매되기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우여곡절도 많았던 이 게임, 과연 결과물은 어땠을까요?
게임의 배경
몇 년 전, 국내에서 화제를 모으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억하십니까. 우승자들은 팀이 되어 아이돌 그룹이 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비리 사건이 터져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게임의 시나리오는 이 쇼 비즈니스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 매몰된 방송무대에 갇히는 불행에 직면하게 되고, 여기서 벌어지게 되는 사건, 사고가 게임의 주된 내용인 셈입니다. [베리드 스타즈]. 게임의 타이틀이자, 게임 속 오디션 프로그램의 이름입니다. 재능을 선보이지 못하고 묻혀있던 스타를 발굴한다는 의미와, 추상이 아닌 공간적인 물리적 상황에 ‘묻혀’ 져 생매장의 위기에 처한 캐릭터들을 표현한, 이중적인 의미를 잘 내포한 제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의 특징과 장점
흡입력을 갖춘 스토리와 연출
매몰된 무대와 그 안에 고립된 5명의 참가자. 안 그래도 대화가 전부인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인데 배경도 작고, 캐릭터도 적다? 뭔가 스케일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오지요? 실제로 스토리 내 장소는 한정적이고 등장하는 캐릭터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점차 그런 점들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게 됩니다. 점점 흥미를 돋우는 전개와 손을 못 놓게끔 궁금함을 유발하는 연출 덕분에 말이지요. 바로 스토리와 연출이 포인트이며, 이 게임의 최대 장점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제작팀은 스토리로 호평받은 회색도시 시리즈의 창조자들답게 자신들의 최대 장점을 이번에도 훌륭하게 발휘했으며, 공백 기간 동안 갈고닦았는지 더욱 원숙해진 무기는 날카롭고 묵직하게 마음을 두드립니다.
울림을 주는 주제의식과 묘사
텍스트 어드벤처라고 해서 단순히 함께 갇힌 생존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이 게임의 전부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쇼에서 제공된 스마트워치로 (현대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SNS 생활을 간소하게나마 영위할 수 있는데요.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아닌 페이터(...)라는 이 가상의 SNS는 유저들의 소통을 통해 단서를 얻기도 하고, 무대 바깥상황을 파악하기도 하는 등 게임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게임은 이 페이터라는 시스템을 통해 고립된 자들의 입장에서 보는 SNS의 순기능과 역기능-주로 역기능에 관련해서 매우 현실적인 묘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모습들은 낯설지가 않습니다. 요즘도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니까요. 근거 없는 가십거리를 남발하는 천박한 대중, 익명이라는 가면에 기대어 비겁한 비방이나 일삼는 불특정다수.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보는 사람이 불쾌할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묘사는 플레이어의 몰입에 커다란 일조를 합니다. 마치 플레이어 자신이 공인의 입장에서 악플을 읽는 듯한 불쾌감을 간접 체험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역설적으로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 게임의 핵심적인 주제가 직접적으로 마음을 울리는 것입니다.
수려한 그림체와 음악, 훌륭한 더빙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탠딩 CG는 훌륭합니다. 캐릭터들의 매력이 녹아든 디자인은 개성적입니다. 플레이어 쪽을 바라보는 정면 샷만 있지 않고, 시선을 틀어 캐릭터의 옆모습을 보여주어 방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도 괜찮습니다.
음악은 흡사 회색도시의 우울한 느낌을 가져온 듯하면서, 거기에 테크노를 믹스한 리듬을 갖추고 있습니다. 음악만 따로 놓고 보면 그렇게 귀에 쏙쏙 들어올 인상 깊은 곡들은 아니지만, 게임에는 매우 잘 들어맞습니다.
무엇보다 언급하고 싶은 점은 성우들의 열연입니다. 귀에 익숙할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에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지니 귀가 즐겁습니다. 더빙에 맞춰진 립싱크 모션도 크게 어색해 보이는 일 없었습니다.
참고로 한국 성우들의 더빙 말고도 일본 음성 더빙도 국내 발매에 포함된 상태입니다. 이쪽도 연기 상태는 훌륭해 보였습니다.
게임의 단점 혹은 아쉬운 점들
콘솔 환경에 동떨어진 UI(유저 인터페이스)와 편의성
이 게임의 설정 화면 등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매우 구시대적이고 지나치게 간소합니다. 본 제작팀이 스마트폰으로 출시했던 마지막 작품인 회색도시 2도 UI가 상당히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로부터 무려 몇 년 뒤에 만든 작품이, 그것도 콘솔이라는 새 플랫폼으로 출시했음에도 이 부분에 별다른 발전이 없었습니다.
미독, 기독에 의한 스킵 설정 구분, 대화창의 투명도 변경 등등.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라면 응당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도 같은 옵션입니다. 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 단점으로 들려도, 이는 별개로 베리드 스타즈는 기본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품인 셈이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매한 몽환 Re;Master의 설정 화면입니다. 알록달록한 디자인은 둘째 쳐도, 뭔가 신경 쓴 흔적이 많이 보이지요?
환경설정 부분을 빼도 아직 시스템적인 문제가 더 남습니다.
일단 베리드 스타즈는 진정한 결말에 이르기 위해선 다회차가 필수적인 게임입니다. 결국 필연적으로 이미 읽었던 문장들, 보았던 Scene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게임의 경우 스킵 속도, 저장 슬롯의 개수, 폭넓은 세이브의 기회 등이 주어져야 플레이가 수월합니다.
짐작하시다시피, 베리드 스타즈는 이 편의성 부분이 상당히 부실합니다. 스킵 속도는 패치를 통해 초기 버전에 비해 빨라졌지만, 다른 문제들은 아직 개선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장 슬롯은 자동저장을 포함해도 총 16개 밖에 되질 않으며, 꽤 긴 플레이타임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슬롯을 적게 배정한 이유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저장은 현장조사나 커뮤니케이션 등 한정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며, 이벤트 중에는 저장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다시 감상하고 싶은 이벤트가 있다면? 그 전의 저장가능했던 구간부터 시작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회색도시처럼 진행할 수 있는 구간을 선택할 수 있는 플로 차트 같은 게 있었다면 위의 문제 대부분은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플레이를 늘어지게 만드는, 지나치게 많은 텍스트 양?
사실 이 부분을 단점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개인차에 따른 견해에 불과할 것입니다. 애당초 읽는 게임인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텍스트가 많다고 꼬집는 것은 FPS게임에 쏴야 할 적이 너무 많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비판일 테니까요.
물론 누가 보기에도 알맹이 없는 내용을 길게 늘여놓거나, 무의미한 반복이 이어지는 성의 없는 전개가 남발한다면 분명히 단점이겠지요. 하나 베리드 스타즈에서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한 부분은 크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각 캐릭터에게 똑같은 단서에 대해 물어보는 과정에 대해 얘기해 보지요. 모든 캐릭터가 사건해결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대화가 특별한 것 없는 신변잡기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면 이건 각 캐릭터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유추할 수 있는 게임의 또 다른 재미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과 상황에 자신을 몰입하며 캐릭터와 대화를 진행해 나가는 것 자체가 이 게임의 스케일과 세계관을 넓혀가는 과정이 됩니다.
결정적으로 이 과정이 반복적일 수 있지만, 게임 진행을 위해 필수적이진 않습니다. 스토리 진행을 위한 키(key) 대화는 게임 내에서 이거라고 확 집어서 알려주니까요.
정리하자면, 텍스트 부분은 플레이어가 이 게임에 얼마나 몰두하고 내용을 음미하고 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빨리 클리어하길 원하거나,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스트리머라던가 이런 분들에게는 글이 너무 많다고 불평할 만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게임의 단점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회차를 거치며 계속 봤던 내용들을 다시 봐야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면 짐작하겠으나, 2회 차도 아니고 처음으로 플레이하면서 텍스트 양이 너무 많다? 이 게임의 장르와 내용이 취향에 맞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통사의 미숙한 일처리
출시 전에 예약으로 패키지를 구매하지 않으셨다면 다들 아실 겁니다. 출시 시점부터 그 이후 이 게임의 물량 상태가 어떠했는지요. 발매 2개월이 다가오는 지금도 패키지를 쉽게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픈마켓 등에선 어처구니없는 웃돈을 얹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판, 스위치판 할 것 없이 말이지요.
DL판은? PSN에 올라왔던 PS4판 쪽의 가격이 잘못되어 스토어에서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발매 당일 2시간 후 잘못 올라간 것이 삭제되었고, 그 주 토요일에야 다시 업로드되는 촌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판매량에 영향을 미친 건 자명한 일이었죠.
어디까지나 참고로 해외 쪽 이야길 해볼까요. 미국의 경우 국내와 똑같이 7월 30일 각각 PSN과 닌텐도 스토어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반응은? 당연하다면 당연했습니다. 하나도 놀랍지 않을 만큼 매우 조용했지요.
그럴 만도 한 것이, 미국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이 게임 상황은 아래 공식과 같습니다.
처음 보는 제작사 + 비주류인 텍스트 어드벤처 + 싸다고 할 수 없는 $49.99의 가격=??
... 일단 환경부터 회색도시 등으로 제작팀의 역량이 진즉 알려진 국내와는 충분히 다른 상황이죠. 그런데 글과 그림이 주축인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인데 가격은 50달러나 된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이걸 덥석 구입할 만한 게이머가 몇 명이나 될까요.
이 게임을 리뷰했던 미국 쪽 유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 게임은 뜬금없이 나타난, 올해 최고의 비주얼 노벨 게임이다’. 올해 최고 운운은 넘어가고, [뜬금없이 나타나]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도록 할까요. 최소한 유통사 측에서 이 게임을 출시하면서 제대로 홍보를 하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입니다.
단순히 리뷰 하나를 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게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해당 국가에 이미 DL 판이 출시되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게임 판매 자체가 어려운 상황임에도, 판매하는 측의 자세가 너무 미진해 보였습니다. 심지어 일본 쪽은 일본 음성 더빙까지 해놓고 출시 일정도 잡질 않았더군요.
.. 물론 유통사가 잘못한 부분들은 게임 자체의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외 출시의 모자란 점과 국내 물량의 현황을 보니 이런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북미판의 경우, 영문 번역을 책잡는 유저가 굉장히 많이 보이던데, 참 여러모로 안팎에서 욕을 들을 수밖에 없는 유통사의 행보였다고 봅니다.
총평
이번 세대에 발매판 텍스트 어드벤처 중에선 최고로 손꼽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품. 애당초 이런 장르의 게임이 얼마 없기도 하지만 이번 8세대 황혼기를 기분 좋게 보내주는 게임이 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몰입에 따라) 다소 늘어질 수도 있는 초중반을 잘 넘기면 정말 흥미진진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와 전개를 보여주는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