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임에는 그 게임의 장르에 걸맞은 조작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명작이 자신의 장르에 최적화된 조작법을 내세워 선지자가 되곤 했지요.
그 유명하고 기념비적인 헤일로의 시리즈의 첫 작품, [헤일로: 컴뱃 이볼브드]입니다.

헤일로: 컴뱃 이볼브드(Halo: Combat Evolved, 2001)의 조작 방식의 의의는
“FPS를 콘솔에서도 가능하게끔 만든 최초의 완성형 조작 체계”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게임이 히트작이라서가 아니라, 향후 20년의 FPS 조작 체계를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헤일로 이전 콘솔 1인칭 슈팅의 문제가
시야 조작 불편
자동 조준 의존
PC FPS의 열화판 느낌
등등이 있었다면 헤일로는
- 왼쪽 스틱 이동 / 오른쪽 스틱 시야를 자연스럽게 정착
- 회전 가속, 감도 곡선 설계로 패드 한계 극복
오늘날의 콘솔 FPS 조작의 기본 공식이 여기서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3인칭 슈팅 쪽으로 넘어가면 기어스 오브 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 원버튼 엄폐 시스템: 'A' 버튼 하나로 엄폐물에 붙고, 뛰어넘고, 옆 엄폐물로 이동하는 직관적인 조작을 완성했습니다. 이전에도 엄폐 개념은 있었으나, 기어워만큼 빠르고 매끄럽게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드물었습니다.
- 카메라 시점: 캐릭터 어깨 뒤에서 따라가는 시점(Over-the-shoulder view)을 정착시켜, 시야 확보와 몰입감을 동시에 제공.
바이오 하자드 4가 TPS 카메라 솔더 뷰 시점을 대중화했다면, 기어즈 오브 워는 엄폐·사격·이동을 통합한 조작법을 확립해 TPS의 정석이 되었음. 이후 대부분의 TPS 게임은 이 두 작품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지요. 즉,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TPS 기본 조작 체계(엄폐, 구르기, 어깨 뒤 시점)는 기어즈 오브 워가 사실상 기준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바이오 하자드 4가 솔더뷰를 먼저 사용했지만 이동사격이 불가능한 불편한 시스템이었고, 무엇보다 조작체계가 방향을 결정한 다음에 직진으로 이동하는 구시대적인 [탱크 조작]이었기 때문에, TPS 조작체계의 정석이라고 까지는 불리지 못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것입니다.
'정석'이 '정석'으로 여겨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

사람들이 '정석'으로 굳어진 조작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순히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인지 능력, 학습 비용, 그리고 게임의 몰입도와 직결되는 효율성의 문제입니다.
- 표준화의 힘: 기어스 오브 워가 정립한 'LT 조준, RT 사격, A 엄폐' 공식은 이미 유저의 근육 기억(Muscle Memory)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 덕분에 유저는 조작법을 배우는 고통스러운 단계 없이 곧바로 게임의 '재미(스토리, 전략)'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 유저는 벽을 보면 "A 버튼을 누르면 숨겠구나"라고 예측하고, 개발자는 그 예측에 맞춰 레벨을 디자인합니다.
- 이 예측 가능성이 무너지면 유저는 캐릭터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껴 불쾌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 조작법이 복잡하거나 독창적이면 뇌는 '조작' 자체에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 반면, 정석적인 조작은 무의식적으로 수행되므로 뇌의 에너지를 전장의 상황 판단, 적의 위치 파악 등 게임 내적인 전술에 쏟을 수 있게 되어 훨씬 깊은 몰입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정석은 유저에게는 "편안함"을, 개발자에게는 "실패하지 않는 기준"을 제공하는 셈입니다.

드디어 붉은 사막(Crimson Desert) 이야기를 해볼까요.
붉은 사막이 계속 지적받아온 문제점이 그것입니다.
2024년 지스타에서 시연데모를 공개하면서 여러 크리에이터와 언론이 당시 게임을 플레이해 보았는데요.
- 다중 입력 시스템: 단순히 버튼 하나로 기술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격투 게임처럼 여러 버튼을 조합(L1+세모 등)하거나 타이밍에 맞춰 눌러야 하는 커맨드가 매우 많습니다.
- 비표준 키 배치: 일반적인 액션 게임과 달리 점프가 □(네모), 대시가 X(엑스)에 할당되는 등 기존 콘솔 게이머들의 습관을 깨는 배치가 혼란을 주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붉은 사막은 2025년 시연자용 데모를 공개하면서 피드백을 받아왔는데요.
일부 크리에이터들이 “조작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컨트롤이나 이동/전투 입력 체계가 논쟁 대상이 되면서
“이 게임의 가장 큰 문제는 '조작방식'일 수 있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In Crimson Desert, the true boss battle is wrangling its controls to unlock the cool combat within
Crimson Desert continues to look strong, but unwieldy.
www.pcgamer.com
유명 게임언론 [PC 게이머]에서는 심지어 '붉은 사막에서 진짜 보스전은 그 전투를 열기 위해 조작방식과 투쟁하는 것이다'라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공개 당시 해외 쪽에서 퍼진 붉은 사막의 조작법 이미지입니다.

범퍼 버튼을 두 번 연속으로 눌러야 타깃 고정 등, 신선함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이 먼저 다가오는 방식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후 이곳저곳에서 이 조작방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2025년 게임스컴에서 어떤 변화를 주었을지 주목하기 시작했지요.
2025년 게임스컴에서 [붉은 사막]을 체험한 국내게임언론 '인벤'은 기사를 남겼습니다.
https://www.inven.co.kr/webzine/news/?news=308588&utm_source=chatgpt.com
펄어비스, 게임스컴에서 개선된 조작감의 '붉은사막' 공개
독일 쾰른에서 열린 '게임스컴 2025'에서 펄어비스가 신작 '붉은사막(Crimson Desert)'의 개선된 버전을 공개했다. 특히 지난 '지스타 2024' 버전과 비교하면 개선된 조작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게
www.inven.co.kr
대부분 좋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개인적으로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위 기사에서 인용하자면
조작감이 개선되었음에도 '붉은 사막'의 높은 진입 장벽은 여전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리고 정식 출시 이후 일반 유저들의 호평이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게임을 익히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위의 전투에서 기둥으로 내려치기 위해서는 L3과 R3을 동시에 눌러 집중한 뒤에 기둥을 주시한 채로 △과 ○을 동시에 눌러 능력을 발휘하고, X키를 연타해 기둥을 들어 올려 △을 선택해 기둥을 잡은 다음 R1 버튼을 눌러야 내려칠 수 있었다.
어떤 게임이든 처음 접할 때는 조작법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붉은사막' 역시 충분히 익숙해진다면 내 몸을 움직이듯 자연스러운 플레이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붉은사막'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플레이어가 익숙해지는 단계까지 몰입을 잃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결국 이처럼 많은 해외 및 국내 평가에서 컨트롤이 여전히 복잡하고 진입 장벽이 높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특히 버튼 조합이 많고 여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다단계 입력이 요구되어, 단번에 직관적으로 다 익히기 어렵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공개된 데모는 초반 튜토리얼을 포함해 조작법을 익히도록 도와주는 구성이 있었으나 일부 리뷰어는 오히려 ‘배울 것이 많아 어렵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인벤의 기사 인용문구에서 필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신념'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은 아름다울 때도 있으나, 끝없는 무저갱으로 무분별하게 추락하는 위태로움으로도 보입니다.
굳이 '정석'적인 조작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다가 무너진 게임을 하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붉은 사막의 조작법이 이런 쪽으로 언급될 때마다 쭈욱 머릿속에 떠오른 게임이었습니다.

바로 2008년 출시한 얼론 인 더 다크(어둠 속에 나 홀로)입니다.
이 게임을 모르시거나 들어본 적 없는 운좋은 분들께 설명드리자면
얼론 인 더 다크 시리즈는 바이오하자드에게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역사 깊은 공포+액션게임이며,
지금은 구시대적인 탱크 조작법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설적인 작품의 1편이 정식 리부트를 한다니 팬들의 기대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더구나 당시는 7세대 콘솔(Xbox360/Ps3)이 막 태동한 시기라 지금 기준으로 어설픈 그래픽이지만 당시로선 충분히 차세대기의 성능을 어필할 만했습니다.
특히! 국내 엑스박스 유저들에게 많은 기대감을 선사했는데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한글 자막번역은 물론, 지금도 흔치 않은 한국어 음성 더빙까지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망했습니다.

예측하셨겠지만 이 게임이 혹평을 받은 이유에는 조작감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스틱으로 무기를 휘둘러 적을 공격하는 체계입니다. 그냥 버튼 하나 딸깍 성립되는 공격 동작을, 굳이 불편하게 스틱을 밀어가며 왼쪽 오른쪽 어설프게 공격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나치게 현실성을 강조한 스틱 조작형 공격은 강약 조절도 힘들뿐더러, 원활한 입력도 되지 않아 게임 내내 스트레스를 부여했습니다.
운전 파트는 특히 지옥이었습니다. 초반 무너지는 뉴욕시를 자동차로 질주하는 미션이 이 게임의 문제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17년이 넘은 지금도 치가 떨리고 혈압이 한계치를 뛰어넘었던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운 조합과 애당초 설계가 잘못된 게임 디자인의 최악의 조합이었죠.
다만 이 게임은 단지 '조작'이 이상하다고 무너진 게임이 아닙니다. 적을 처치하려면 '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정 때문에 급상승하는 난이도. 굳이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하는 소지 아이템 등. 이 게임에는 쓸데없는 '뚝심'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잘못된 방향의 신념은 끝없이 추락하는 무언가와 같았지요.
개인적으로 이 게임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고전 공포액션게임의 부활이라는 흥미로움과 트레일러의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음악. 신작 분위기를 고조하는 한국어 더빙 소식까지.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것들은 전부 무(無)가 되었습니다.
전 여기서 제작사의 '뚝심'이 조작체계 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한 쪽에만 집중하는 외곩수가 되다보면 내가 지향하는 목표의 단점과 불안점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곤 하더군요. 설사 그것이 다수가 반대하고 싫어하는 길일지라도 내 의지와 생각은 확고하기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붉은사막이 [얼론 인 더 다크]처럼 조작체계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이런 과한 신선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문제점이 보일까 살짝 걱정이 됩니다. 뚝심과 신념은 좋든 나쁘든 전염되곤 하니까요.
[붉은 사막]은 이미 골드행 기차에 오른 상태입니다.
게임 본편 발매만 남았으니, 더 이상 본격적으로 수정을 가할 일이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출시 후 수정패치 업데이트는 가능하겠지만, 제작사가 생각하는 최선의 수는 다 끝마친 상태라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앞으로 한 달 그리고 2주 뒤면 그 진면목을 볼 수가 있겠지요.
마음 한편에 담고 있는 그 불안함과 의구심이 한낱 기우로 끝맺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오랜만에 등장한 AAA 싱글 국산 게임을 응원하고 싶은 게임 유저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